꽃 피우는 때를 잘 아는 풀꽃. 알아주는 이 없어도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을 낸 다음 알록달록한 꽃을 뿜어 올립니다. 지난 해보다 영역을 조금씩 넓히기도 합니다. 그래야 벌나비도 많이 찾아들고 나름대로 살아남기에도 유리할 테니까요.
어릴 적 주변에서 보던 꽃 이름이 아슴합니다.
'이게 무슨 꽃이더라?'
갸웃거리며 기억력의 문제로까지 비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잊고 있던 꽃을 언뜻 들춰내기도 합니다.
'맞아. 막내이모가 이 꽃을 좋아했어. 이와 비슷한 다른 꽃도 있었는데.'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뒤집니다.
'아, 이 꽃이 아닐까?'
지레 짐작한 꽃이 알고 보면 전혀 다른 꽃이어서 계면쩍게 머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갈래가 많고 엇비슷하여 좀처럼 분간되지 않는 꽃과 꽃 이름들.
너도나도 고운 꽃을 찾아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바람에 모른 척 지나칠 때도 있습니다. 꽃을 똑같이 찍어 무엇하겠습니까. 합류하지 않는 이면에는 시끌벅쩍한 난장판에 앉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자제하려는 가상한 노력도 있습니다. 꽃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마음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도록 난삽하게 꽃에 집착해서는 안되겠지요. 하지만 꽃을 보며 느끼는 반가움이나 꽃 필 때쯤 그 장소에 쫓아가려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는 건 은연중의 습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끔 제가 감성적으로 아주 무딘, 철가슴이지 않을까 하여 염려합니다. 왜냐하면 뜨거운 피가 넘치는 열정을 늘 억누르려고만 애써왔으니까요. 오늘 누군가는 제앞에서 이별을 얘기합니다. 헤어져야 좋아지는가. 무심하게 눈을 감습니다. 결국 내뱉었지요.
'그래,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사람과의 관계를 잇기보다 자르는 데 익숙하고, 눈을 떠 멀리, 넓게 바라보기보다 의미없는 곳을 응시하거나 시선을 비켜 아래쪽에 두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담벼락 아래 듬성듬성 자라는 풀꽃이 더욱 애잔하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커다란 등걸 그늘에 가려진 여린 삶 하나마다에 하찮은 제 존재를 견주어서 그랬을까요. 한 계절을 넘지 못하는 풀꽃, 풀꽃처럼 어쩌면 저도 금방 지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사그라들기 전에 인연을 마음속에서 지우려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태에 대하여 이것저것 뒤적이기도 합니다. 찍은 사진을 보면 꽃 핀 때의 환한 모습만 담겨 있습니다. 봄날의 가상한 싹이나 물먹은 잎새, 꽃 핀 모습, 씨앗을 담은 의젓한 자태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지 못합니다. 누가 억지로 다그치지 않기에 애써 파고들지도 않았지요. 자연히 수박 겉핥기식의 탐색습관을 바꾸지 못해 꽃이라든지 증표가 없으면 정체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도 따지고 보면 우매한 탓입니다. 그러고도 뭇사람들 앞에서는 난 체하며 이것저것 드러내 뻐기겠지요. 선화후엽인 목련이 별 같은 꽃을 지우고 무성한 잎 속에서 꾸물거리더니 삐죽한 열매를 만듭니다. 며칠만에 열매는 떨어뜨렸지만 씨방을 오롯이 간직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목련을 쳐다보지 않아요. 그들은 봄날 즈음 눈부신 목련 꽃이 떨어진 순간부터 아예 눈길을 두지 않더군요. 그런 순간에 저도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흠칫했습니다. 숲속에 지금 어떤 꽃이 피어 있을까를 그리다가 미간을 찡그립니다. 꽃이 피어 있지 않을 때의 풀이나 나무 등을 가늠할 자신이 없거든요. 혹시 모릅니다. 내가 그리는 당신도 예전 곱게 피어 있을 적의 모습만 기억하는지도. 이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은 우리는, 어쩌면 스쳐지나더라도 자신보다 귀하게 여겼던 상대를 전혀 모른 채 묵묵히 남은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Giovanni Marradi, Gh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