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기 아래 타일 바닥이 붉게 물든다. 녹물인가. 공동 저수조를 쓰니 다른 집에서인들 마찬가지여서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거야. 의아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헌데 봄날 초원에 풀꽃 피듯 생긴 붉은 기미가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차 짙어지며 영역도 넓어진다. 어느 아침 칫솔질을 하다 말고 눈에 거슬려 솔로 북북 문질렀다. 거친 솔질을 따라 자국이 지워진다.
"이것 봐라. 물든 게 아니고 뭔가 덮여 있는 모양이네."
이왕 시작한 참에 타일 사이 때도 닦고, 변기 등 보이지 않는 곳까지 말끔히 청소했다. 비록 팔이 뻐근하지만 운동삼아 하다 보니 이도 습관이 되었다. 더구나 청소로 말끔해진 세면실이 주는 개운함으로 흐뭇하다. 생각난 김에 관리실을 찾아가 이러저러한 걸 묻지만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한 눈치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요즘 아이들이 즐겨쓰는 첫째 번 방법, 인터넷 지식창고를 뒤지고서야 타일 바닥 붉은 무늬가 어렴풋이 곰팡이라는 것을 알았다. 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기생식물. 그게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지 모르므로 이제부터 기미가 보이면 닦아 없애기로 작정했다. 아니다, 이게 내가 모르는 어떤 초능력을 주는 물질은 아닐까 싶은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퇴직하고 집에서만 생활하는 친구가 연락을 했다. 왜 집에만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이 무서워서'라며 기피하는데 거짓이 없어 보인다. 떫떠름하지만 마주 앉았는데 자랑이랍시고 덧붙이는 말이 가관이다. 비록 손에 주부습진이 생길 정도이지만 사는 게 재미있다는데. 요리 솜씨도 제법 늘었다고 떠든다. 정성들여 차린 음식을 식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나. 아, 이 녀석과 이렇게 시간을 떼우며 술을 마셔야 하는지도 불만이다.
살림하는 걸 난들 모르나.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남는다. 챙길 것도 많고, 이를 하나하나마다 실행해 나가야 한다는데 신물이 난다. 이게 어느 순간 혼자서도 충분히 지낼 수 있다며 쫓아나온 탓이다. 여기에 아이도 딸려와 있는 바람에 이거야말로 오롯이 내 짐이 되어 버렸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잠만 자고 나갈 뿐 손끝 하나 까딱할 줄 모른다. 멀리 따질 것도 없다. 그제도 밥해 놓고 기다리는 제 아비는 아랑곳없이 연락조차 없다. 침대에 누워 책을 한 권 들고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현관문이 열린다. 가슴께 책을 얹고 누워 있었더니 들어오다가 움찔하는 기색이다.
"아빠, 친구하고 왔는데.....괜찮지요?"
이런, 속없는 녀석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지. 시각을 봤더니 이미 열두시에 가깝다. 이미 데리고 온 친구를 쫓아낼 수야 없지. 떫떠름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아이 친구가 꾸벅 인사한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로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야, 이 녀석아. 늦을거면 말을 해야지."
"어? 제가 문자를 보냈는데요."
저런 녀석 봤나. 죄송하다는 말은커녕, 친구 앞에서 더 이상 쫓을 일도 아니므로 쓴 표정만 지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냉장고를 열더니 그 안 가득한 음식들을 줄줄이 꺼내 놓고는 사 온 캔맥주를 마구 따기 시작한다. 아마 나도 합세하기를 바라는 눈치인데, 이미 시장기를 놓친 지 한참이라 그럴 수도 없다. 모른 척 티브이를 틀어 놓고 있었더니 얘들은 잠잘 기미가 없다. 한참을 있어도 조용하기에 슬쩍 눈길을 던졌더니 탁자에서 마주보고 앉은 채 서로 스마트폰에만 눈길을 꽂고 있다. 보는 주제가 다른지 한 녀석은 '킬킬'거리며 보고, 다른 녀석은 심각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안잘거냐?"
보다 못해 채근하고서야 주섬주섬 일어나는 아이들. 사 온 치킨 등은 어차피 버릴거니 싸서 넣어 두라고 하는데도 그냥 식탁에 굴리고서는 씻지도 않고 누울 기세다. 피곤하지만 그냥 둘 수 없다. 다시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더니 그제서야 후다닥 움직인다. 주눅 든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쫓아야만 하니 서로가 피곤할 뿐이다. 다음에는 잠자리가 문제다. 침대에 올려 같이 잘 수도 없고, 이불도 넉넉하지 않아 난감하다. 그래도 괜찮다며 저희끼리 누웠는데, 한밤중에 깨어보니 이불은 저만큼 있고 애들은 소라 껍질에서 쫓아나온 연체동물처럼 알몸뚱이로 웅크리고 있다. 겨울이 아직 멀다지만 밤공기가 차갑다. 침대 위 이불을 걷어 각각 덮어 주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인다. 그래, 여기도 둥지라고 찾아들 줄 알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이래저래 온갖 간섭을 다해야만 겨우 주변이 정돈되어 바라는 대로 만들어진다고 여기는 나도 문제다. 어느 만큼 되면 훌훌 떨고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점점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는 이 성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Sean Michael Paddison, Wouldn't Change A 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