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나 하천, 산을 경계로 나뉘어지는 동네. 그 경계를 넘으면 세상이 바뀐다. 그걸 안 다음 심심하면 방천 너머 작은집에 쫓아갔다. 오고갈 만한 거리였으며, 오래 전 미군부대가 있던 곳이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촌들과 지내는 것도 좋다. 거기에 언덕 위로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은 집마다 들락거리는 조무래기들이 더 재미 있다. 작은엄마가 말이 많다. 인사를 드리면 족히 한 시간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게 질색이지만 어떡하나. 한 귀로 흘려 들어야지. 혹여 사촌동생이 미술 숙제라도 있어 부탁하면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처리하고 놀았다. 나는 잊고 있어도 사촌들은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꺼낸다.
아버지는 말술이지만 작은아버지는 한잔만 들이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경찰로 근무하던 작은아버지가 정년퇴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작은엄마가 넋두리를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술 드시지 말라고 해도해도 드시더니."
술자리에 있는 적이 드문 분이다. 어쩌다가 아버지와 자리를 해 한두 잔에도 불콰한 얼굴로 집에 가셨는데, 다분히 그걸 떠올린 작은엄마의 말 속 뼈가 드러나는 지청구이다. 그보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 슬픔은 똑같지만 표현 방법은 다르다. 너도나도 악다구니를 쓰며 운다. 사촌 여동생 셋은 개인기도 다양하다. 마치 누가 더 슬픈가 내기를 하는 것처럼. 소리 지르거나 딩굴고 울어 눈이 짓무른 것은 물론. 헌데 웬일일까. 나는 아예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부대끼는 와중에 사람들 반응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는 작은엄마 눈에는 그게 밉다.
"에휴, 쟤 좀 봐. 눈물 한 방울도 안흘려!"
멀리 있던 다른 사촌이 와서는 작은아버지 시신 위에 다짜고짜로 엎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 짝이 없다. 슬그머니 화장실에 갔다. 슬픈 세상 이야기를 다 떠올렸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곤혹스럽다. 사춘기였을 때이다. 내 안에서만 똬리를 튼 차가운 감수성 때문이지 않았을까. 다행히 울지 않는 이가 있다. 아버지이다. 그게 위안이다.
수십 성상을 넘었다. 서너 해 전에 미수를 맞이하신 작은엄마.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 사람들과 자리를 만들었다. 진심으로 축하했다. 아직 치아도 몇 잃지 않았고, 속 썩이는 아이도 없다.
"야야, 그래 서울에서 오느라고 무척 힘들었지?"
손을 만지작거리며 놓지 않는다. 말 끝에 '건강이 어떠시냐?'고 묻는 내게 무릎 연골이 안좋다며 슬쩍 이른다. 드러내지 않아도 사촌들보다 영악한 내게 보이던 미운 감정이야 아득한 이야기이다. 참, 사촌네만 가면 짖어대는 '왕비'라는 개가 있다. 이게 어릴 적 작은엄마같은 성정을 보인다. 가까이 가기도 전부터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대는 성질머리하고는. 곁에 가는 식구들 누구 하나 왕비에게 물리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람으로 치면 할머니 격이라는 개를, 그래도 이쁘고 사랑스럽다며 제 식구들은 끼고 도는 걸 슬쩍 외면한다. 공통 면이 있어 겹치고 중첩되며 같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적 방천을 넘나들듯 용감할 수 없을까. 선을 긋고 경계를 넘기 어려워하는 나. 아무래도 죽어도 철들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