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그렇게 알게 된다면

*garden 2018. 7. 4. 02:30




사무실 책상에 올려 놓은 '클래식 LP 전집'. 다들 궁금한 눈길을 보낸다. 박스를 뜯었다. 몇날 며칠 고심했다. 작정한 다음 주문하니 이렇게 쉽게 온다. 이제 집으로 옮길 궁리를 한다. 통째 들고 갈 필요는 없고, 열댓 장씩 몇 번 가져가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용물을 살펴본다. 클라우디아 아바도(Claudio Abbado)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 가슴 뛰는 이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등 거장들을 몇번이나 확인했다. 이게 내 손에 들어오다니. 실감나지 않아. 혼자 킬킬거리며 웃을 뻔했다. 동료들이 기웃거린다.
"이번에 큰일 저질렀구만....."
"그러게요, 몇 달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야지요."

동그란 LP를 꺼내 들었다. 물결 무늬에 갈무리된 음악을 떠올리며 면을 쓸어본다. 눈을 감았다.
"무척 좋으시겠어요!"
"아, 네. 꼭 들어보고 싶던 곡들이어서."
건너편 Y이다. 어느새 옆에 왔을까. 옅은 지분 냄새가 후각을 스친다. 일이 연관되어 있다. 넘기면 말 없이 웃음만 짓는 아가씨이다. 어쩌다 보면 아기처럼 통통한 얼굴이 귀엽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전공과 관련 없는 일을 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없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발그레한 볼을 감싸며 뭔가 이야기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들자 풍성한 단발머리와 긴 속눈썹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저어, 그 중 몇 곡 녹음해 주실 수 없나 해서요."
"어려울 것도 없지요. 오늘 가서 오디오 상태를 점검해 볼게요."

다음 날부터 전에 없이 내 앞에 커피도 타다 놓는다. 더러 기대의 눈길을 보내는데, 은근하여 가슴이 떨릴 정도이다.
"헛참, 괜한 약속을 해서는....."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에이, 그럴 일이야 없고."
동료들이 놀리는 걸 손사래로 막았다.
다음 날 바로 공테이프를 받아 두었지만 시작하려니 만만치 않다. 준비할 것도 많고. 퇴근 후 발목 잡는 술자리에 차일피일 늘어진다.

마침내 휴일이 되었다. 엔간한 약속이야 다 뿌리쳤다. 작정하고 매달려 짜둔 레퍼토리를 꺼냈다. 일일이 확인하며 녹음해 나간다. 헤드폰 한편에 잡음이 들리지만 개의치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점심도 걸르고 열중해서 저녁 무렵에야 마쳤다. 테이프 열 개라면 사십분씩 잡아도 족히 일곱시간이나 되는 분량이지 않은가. 곡을 확인하며 걸고, 이음매 부분이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애쓰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테이프 하나를 걸고 확인한다. 헌데 어제 헤드폰으로 들리던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의외로 크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이어지는 음이 그치지 않는다. 왜 이러지? 의아하지만 간과했다. 테이프에 번호를 매기고 작성한 레퍼토리를 확인한 다음 녹음 중 바뀐 부분을 새롭게 고쳤다. 떨쳐버리듯 묵은 숙제를 끝냈다.

녹음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몇번이나 확인하던 Y. 테이프를 건네자 환한 얼굴이 달덩이 같다.
"덕분에 저도 좋아하는 곡들을 되새기며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헌데 다음 날,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겼는데, 눈길마저 피하는 게 웬일일까. 복도에서 마주친 Y를 불러 세웠다.
"음악은 들어 봤나요?"
"......"
"무슨 일이 있나요?"
대꾸도 없이 피하려는 Y를 붙잡았다.
"내가 무얼 잘못했나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러나요?"
"녹음 상태가 이상해서요!"
"아, 그럼 말하지 그랬어요. 나도 미처 확인을 못했는데 하나 줘봐요."
테이프를 들어 보고서야 '아차!'한다. 근사한 음악을 방해하는 이 정체불명의 소음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안절부절한다. 집에 왔다. 오디오를 샅샅이 뒤지고서야 원인을 찾았다. 뒤쪽 접지선이 빠져 나는 소음이다.
다음 날 출근해서는 Y를 불렀다. 이러저러해서 그러니 테이프를 모두 달라고 했다. 다시 녹음하면 된다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호기롭게 말했는데, 어렵쇼?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애써 딴전 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컷 알아 듣게 설명했는데, '되었다.'면서 시큰둥하게 뿌리치고 가는 Y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건 뭐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다. 나중 몇번이나 간청했으나 아예 외면한다. 거참, 녹음하기 전에 몇번이나 저녁 식사를 하자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다른 일도 겹쳐 있었지만 마땅히 함께 저녁을 할 만한 거리가 되지 않아 물리쳤다. 그것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 때문에 속끓이는 내가 어리석어. 마주치면 잘 웃던 귀엽고 상냥한 Y는 어디 갔을까. 고집불통에 삐딱한 저 Y는 대체 어디서 쫓아나온걸까.

누구나 마음속에 괴물을 들이고 살거야. 그 괴물이 활개칠 땐 자아가 눌려 별수 없이 온전한 자기도 힘을 못쓰겠지. 나도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괴물을 들이고 산다. 그걸 억누르려고 평생 고심했다. 더러 한잔 술을 걸치면 그 괴물이 주도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 적이 많았는데, 이도 아득한 이야기이다. 오래되어서인지 인제 마음속 괴물이 어느 때 궁금하다. 불러도 감감하니 사그라졌을까. 생전 드러내지 않던 자기 속 괴물 때문에 내게 뾰루퉁하던 Y에게 그때 내 괴물은 왜 맞대응하지 않았을까.














Fabrizio Pigliucci, Dust To 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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