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는 별일 아니다. 당장 하느냐 마느냐부터 결정해야 할 절제절명의 과제이니. 어떻든 떠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내내 선잠을 잤나 보다. 낡은 영사기를 돌리듯 군데군데 끊어져 모호한 꿈과 어울려 부스럭대는 소리, 누군가 배낭을 열어 뒤적이는 소리, 털털대는 버스 진동과 한밤중 굉음을 내며 지나치는 터보 자동차 굉음을 미간을 좁힌 채 듣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닿았다. 웅성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버스에서 내리자 한기 감도는 새벽 공기에 움찔한다. 비로소 떠나온 걸까, 어쩌면 제자리에 돌아온 걸까.
신새벽 설악 소공원을 지나는 등산객들 요란한 걸음. 연대급 군대가 지나는 것 같다. 허나 열병이나 분열의 일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투박한 소리가 행진하는 것처럼 거창하게 들리다가 이내 어둠에 녹아든다. 너도나도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있어 희번득이는 불빛이 난무한다. 멀리 있던 우람한 숲이 다가왔다. 바닷물에 빠진 조약돌처럼 아무런 표식 없이 등산객을 한무리씩 삼키는 숲.
어둠에 눈을 깜박였다.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GP 수색병처럼 눈과 귀를 열고 나아가는 길.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숲 사이로 펼쳐진 손바닥 만한 하늘.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절로 찬탄을 머금었다. 언제 저렇듯 총총한 별을 보았던가. 보석을 흩어놓은 듯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 하늘을 우러르며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휘황하게 반짝이는 별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휘청이는 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했다. 이러면 안되지. 익숙한 별자리와 길게 늘여진 은하수 띠를 찾아냈다. 바위 무리가 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빛나는 하늘로 군무를 하듯 묵묵히 오르는 사람들. 별을 따기라도 할건가. 고개가 말 등처럼 생겼다는 마등령. 험준하기 짝이 없어 네 발로 기어오르기에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다지. 무릎에 견줄 수 있는 바윗돌이 그치지 않아 힘겹다. 보폭을 예사로 떼서는 어림없다. 암릉을 밟고 올라도올라도 끝이 없는 등성이. 기력이 없다 해도 누구에게 손 벌리랴. 가쁜 숨소리를 삼키려고 애쓴다. 피가 역류하는 듯하다. 얼마 동안 산을 찾지 않았던 나태함이 드러난다. 나를 받힌 다리와 미세하게 이어진 근육들마다의 떨림을 느끼며 사방을 둘러본다. 험준한 눈앞 벽을 거슬러 반딧불이처럼 쫓아 오르는 빛 띠가 장관이다.
명색이 가을인데, 벌써 이리 추워. 센바람 탓인지 나무들마다 잎을 다 떨어뜨린 삭막한 풍경. 겉옷을 벗을 수도 없고, 껴입기도 난처하여 엉거주춤한다. 겨우 사물을 어림잡을 수 있는 여명. 방금 전 그 많은 별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옆사람을 식별하여 일행을 찾아야 했다. 쉬지 않고 올라야 제대로인 아침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예상 시간으로는 마등령을 오르는데 네 시간, 공룡능선에서 네 시간, 무너미고개를 넘어 천불동 계곡을 지나 비선대로 해서 신흥사 주차장까지 가는 데 세 시간을 잡았다. 지체되면 예약한 식당 약속도 빡빡할 뿐더러 귀경 후 자정까지 집에 돌아가기가 막연하다.
공룡릉은 설악 늑골로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른다. 마등령에서 시작하여 나한봉, 큰새봉, 공룡 맹주라는 1275봉을 돌아 신선대로 이어져 희운각 대피소 앞 무너미고개에서 끝난다. 마등령을 코앞에 두고 해가 올라왔다. 불끈 솟은 해가 구름 띠를 지나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이렇게 산길에서 하나가 되는 것도 좋다. 설악 빼어난 봉우리들이 황금색으로 치장되었다. 한며칠 내 설친 걸음 탓인가. 기진맥진하다. 곡기 없이 진행하다가는 자칫 허물어질 수 있다. 와중에 일행이 한데 모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 않나. 행동식으로라도 아침을 해결해야지. 눈에 보이는 것마다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 넣었다.
국립공원 100경 중 제1경이라는 명성에 걸맞다. 지금은 통제되지만 나란한 화채능선의 눈부신 가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햇살이 우리를 보듬었다. 올 적마다 '다음에도 여기 올 수 있을까' 혼자 묻는 버릇이 생겼다. 사그라져 버린 꽃이 애처로운 시절. 천불동 가을 단풍과 폭포를 그리지만 공룡 등은 멀고도 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