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라고? 헌데 너무 요란스럽지 않은가. 오전 내내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다. 거기에 낯선 먹장구름이 몰려드는가 했더니, 급작스레 눈비가 뿌려지면서 천둥번개까지 동반되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흩어졌다.
"으헛, 날이 갑자기 왜 이래?"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묻은 물기를 떨며 웅성댄다. 개중 누군가 처방을 내린다.
"봄이 오긴 오려나부네. 난리굿 다음에 조용해지지, 아암!"
그 말이 맞다. 그건 어젯일이다. 내려오는 동안 평온한 하늘과 화사한 햇살에 마음이 푸근하다. 이미 와 있던 동생들이 반가이 맞는다. 우선 어른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거실이 시끌벅쩍하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야. 오랜만에 느끼는 활기에 아버지 얼굴이 환하다. 안방 문을 열었다.
"야야, 이렇게 좋은 날 커튼이라도 좀 걷지 그러냐?"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잠만 주무신다는 어머니. 왜 이렇게 가라앉기만 하는 걸까. 미동도 없는 몸을 만져본다. 장작처럼 삐쩍 마른 모습이 안타깝다. 침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창쪽으로 향하게 만든 다음 커튼을 걷었다.
"조금씩 봄이 오나 봅니다."
수십년째 한자리에만 있어 익숙한 물건들. 어머니도 어느새 붙박이 물건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알싸한 바람이 들이차지만 괜찮겠지. 맞은편 바위언덕을 타고 내린 개나리 물결이 풍성하다. 따뜻한 볕이 어둑한 방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휘감고 돈다. 밖으로 드러내지 말자고 작정하신 걸까. 위중한 병색이라곤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아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어느 때 들고 온 쫓다발을 보며 '곱기도 하다'고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걸 버리지 않고 한동안 벽에 걸어두더니. 어쩜 기억 안 꽃잎처럼 박제되고 싶은 건 아닐까.
작은 아이가 들어와 명치께 홑이불 위에 모아 둔 할머니 손을 만졌다.
"왜 할머니는 일어나시지 않는 거에요?"
"글쎄, 지금 곱고도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어 깨기 싫으신가 보다."
"그래도 아빠 말처럼 이렇게 예쁜 싹도 돋았는데...."
지나치던 고속도로에서 파릇하게 싹을 틔워낸 가지 하나를 잘라왔다. 겨울이 아득하다. 메마른 계절을 건너 비로소 푸르른 물을 끌어올린다. 생기 묻은 깃털 같은 가지로 아이가 할머니 코끝을 간질렀다.
"그러면 안돼!"
옆에서 아내가 말린다.
"아무렴, 놔둬."
아이 바람처럼 긴 겨울잠 뒤에 부스스 깨어난 나무같이, 그렇게 생기를 순으로 올리며 어느 순간 어머니는 큰 기지개를 켜지 않을까. 할머니 옆에서 재미있는 책이라도 읽어 드리라고 했지만 봄볕이 살랑인다. 따스한 기운을 따라 어느새 조무래기들은 몰려나갔다.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니 벙근 목련과 노랑 산수유 꽃 아래 병아리처럼 떼지어 다니는 무리들 속에 섞여있다.
십여 성상이 지나 다시 새 순이 돋는 계절. 어쩌면 어머니는 그때 그 순간, 쓴듯 아련하고 생기 가득한 순 냄새에 나른한 감각을 한 곳에 모으지 않았을까. 오늘 같은 봄날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웃음을 짓고 계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