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옷이 날개라고

*garden 2021. 9. 16. 02:00












퇴근해 들어온 아이. '덥다, 더워!'를 연발하며 바깥에서 묻힌 텁텁함을 손사위로 털어낸다. 더위에 지친 탓일까. 체념우선인 어투 끝에 샤워부터 하고 나온 다음 팬티 바람으로 나대는 아이. 여기저기 벗어 놓은 옷이야 치우겠지 싶은 바람도 공염불이다. 다 큰 녀석에게 매번 잔소리를 할 수 없지만.
"야, 임마. 그게 뭐냐?"
"참나, 내 집에서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그러세요?"
"이게 네 집이냐?"
"적을 두고 보금자리로 삼으면 그게 제 집이지, 남의 집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보기 흉해. 옷도 잘 벗어야 예술이지, 잘 못벗으면 외설스러운 것 알지! 잠시 뒤 동생이 들를지 모르니 아무 거라도 걸치고 있어!"

여름이야 더워서 그러려니 하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빵빵한 난방으로 벗은 채 가뿐하게 생활하니, 일년 사시사철이 의미 없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구를 닮은걸까. 눈 질끈 감으려지만 그럴 수 있어야지.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덥다며 에어컨을 줄기차게 틀어놓고 있더니, 한기가 느껴지자 이불을 꺼내와서는 몸에 둘둘 감고는 티브이 프로에 빠져 낄낄댄다. 별 수 없이 에어컨을 꺼자 잠시 후 이불을 내려놓은 듯하다가 주섬주섬 리모컨을 찾더니 다시 에어컨을 켠다. 얘가 생각이 있는 거야, 뭐냐!

외출할 일이 생겼다. 여름이니 캐주얼하게 걸치고 나가야겠지. 헌데 입을 옷이 마뜩찮다. 장롱을 뒤지다가 잔뜩 엉클어 놓고는 한숨만 내쉰다. 매번 뻔한 옷을 입으니 사람 꼴이 그냥 그렇지 않겠어?
작정하고는 날을 잡아 옷을 정리했다.
'어랏, 이런 옷도 있었어. 이건 또 언제 옷이야. 그것 참, 나도 모르는 내 옷이 이리 많다니!'
아이들이 사 온 옷, 선물 받은 옷, 어쩌다가 지나며 구입한 옷 등이 꺼내 놓자 산더미이다. 특히 겨울 옷은 왜 그리도 두툼하고 부피가 나가는 게 이것저것 종류별로 많을까. 옷도 눈에 띄면 입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륵이다. 더구나 철마다 바뀌는 옷이라면 선택되는 게 쉽지 않다. 회사 출근때야 정장 차림이면 무난했지만 인제 그렇게 자신을 욱죌 필요가 없다. 회사나 그외 사람 들과의 모임에 노타이로 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어느덧 나도 무장해제가 된 걸까. 가외에 운동이나 등산, 출사, 모임 등 야외활동이 잦아지자 그에 알맞은 기능성 옷을 찾게 되는 데 그 영향일까. 본의 아니게 알록달록한 유색 옷도 많다. 안되겠어. 상표가 붙어 있어 그럴 듯한 새 옷은 등산 등 모임에 나갈 때마다 깔끔한 쇼핑백에 담아 입을 만한 친구에게 건넨다. 하고 입지 못할 옷 등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남은 옷도 많지만 역시 입고 나갈 수 있는 건 극소수. 이거이거 그럴 듯한 옷이 있어야 하는데 말야. 사람은 옷이 날개라잖아. 이참에 쇼핑 한번 해야겠어. 철마다 갈아입을 산뜻하고 마땅한 옷을 장만하자. 나이가 들수록 그럴 듯한 옷을 걸쳐야지. 마침내 날을 받아 운동화를 사러 가는 장 소장과 뜻이 맞았다.
"어디로 갈까요?"
"옷 많은 데로 갑시다. 낫살 먹은 우리가 들쑤셔도 괜찮은 곳으로."
"가만, 파주 아울렛이나 시흥 아울렛 중에 골라서 갑시다. 네비로는 시간이 거의 같이 걸리는데....."
오후도 한참 지난 즈음이지만 파주로 가다가 틀어서 닿은 시흥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코로나니 뭐니 해도 이런 것 보면 다른 세상 같기만 하단 말여."
구시렁거리며 도장깨기하듯 각 샵을 두드린다. 인파를 헤치며 헤매다 보니 이도 여간해야지. 쉬이 지친다. 자칫 아무것도 못사고 갈 것 같은 이 조급증은 또 뭐야. 그래서 일단 나앉았다.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곁들이며 마음을 다잡아야지. 운동화를 고르는 장 소장 품새를 보니 역시 마땅한 게 없는 모양이다. 열 군데는 더 들렀건만. 대신 나는 엉뚱한 슬리퍼라든지 뻔한 와이셔츠 등을 몇 개 사 들었다.
"이것 어때요?"
그럴 듯한 상점에서 장 소장이 여름 외투를 걸치고는 이리저리 돌아본다. 조금은 어색한, 패션쇼에 오른 선머슴아 같아서 실소를 했다.
예전 회사 근방 마포 G호텔에 뷔페가 들어섰다. 뷔페가 일상화되기 전이라, 맛있고 근사한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는 게 제법 신기하다. 가격이 만만찮지만 사람들을 데리고 회식 등을 핑게로 쫓아간다. 그러다가 식구도 불러 거기 데리고 갔다. 헌데 문제점을 발견했다.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식구들도 매번 자기가 즐겨먹는 음식만 들고 오는 게 아닌가. 그럴려면 차라리 전문점에 가서 먹지. 이런 곳에서야말로 그 동안 먹지 못한 근사한 음식을 들어보라고 매번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예처럼, 장 소장이 신상으로 입고 온 옷이 십년 전쯤 걸치고 있던 옷과 어찌 그리 똑같을까. 내 눈에는 띄지도 않던 저런 옷을 저 이는 대체 어디서 골라올까. 아하, 무릎을 쳤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늘상 새 옷이라고 사지만 그렇고 그런 안목에 가려 매한가지 옷을 입고는 우쭐하며 자위하지 않았을까. 아니, 서너 해 전 옆에서 일류 코디라면서 조언해 준 옷을 입은 적이 있다. 헌데 아이들 취향이어서인지 내가 즐기는 품이 넉넉한 옷이 아니라 몸에 좌악 달라붙는 옷을 권하기에 한동안 입고 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해가 지나 빛바랜 양복 웃도리를 꺼내 들자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역시 몸에 편하고 잘 들어맞는, 그리고 튀지 않는 옷이 내게는 제격이야. 또한, 세탁을 해도 새옷처럼 내 몸에 들이맞는 보온이나 방풍, 발습이 제대로 되는 기능성이면 더욱 좋은데 말야. 헌데 그러한 옷도 오래되면 기능 자체를 잃어버리니 문제다. 설마 한둘이야 고르지 못할까. 다시 눈을 부릅뜨며 일어섰다.


옷 만드는 게 사양산업이라지만 이는 한치 앞도 못보는 얘기이다. 누천 년 이래로 사람들이 입어온 옷을 보라.
일본 아마이케(天池) 합섬은 세상에서 가장 얇고 가벼운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선녀의 날개(天女 翼依)라 이름 지었는데, 광택이 나며 촉감이 부드러운 천 무게는 일 제곱미터에 오 그램밖에 되지 않는다. 아르마니 등 글로벌 명품브랜드나 디자이너들이 이를 주목했다. 어느 때 백화점에 가서 아르마니 여름 양복을 입어보고는 가격에 구애 없이 살 뻔했다. 이는 틀림없이 아라크네가 살아서 직조한 그런 옷감일거야. 결국 죽기 전 몇번이나 입을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에 겨우 구매충동을 억제했다.
빙상대회 때마다 김연아에게 치였던 피겨선수 아사다 마오 등 스포츠 선수 들이 입어 화제가 되었던 에어위브(Air Weave) 소재로는 직경 일 밀리미터 폴리에틸렌 초미세 합성수지 낚싯줄을 만든다. 이것을 갖고 오 센티미터 두께 휴대용 고탄력매트리스를 만든다. 가볍게 돌돌 말아서 휴대할 수 있어 어디서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신체 압력을 부드럽게 흡수.분산할 수 있도록 특수 고안하여 숙면에 도움된다. 구십 퍼센트 이상이 공기로 복원성과 통기성이 우수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성질이 있다.
이면을 들여다 보면, 큰아버지의 낚싯줄 제조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카오카 사장이 낚싯줄을 이용하여 개발하고 있는 시제품 매트리스에서, 평소 허리가 좋지 않은 식구가 잔 다음 가뿐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게 히트하게 되었다고 한다.

멋과 개성을 표현하는 패션이 최첨단 IT기술과 만나 참신한 미래형으로도 구현된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로보캅 등도 이의 일환이라고 여기면 된다. IT 기능을 입은 옷으로는 '폴린 판 동언'의 태양전지 의복이 있다. 이 옷으로 햇빛에 한 시간 정도 노출시키면 휴대폰 배터리 오십 퍼센트를 충전할 수 있을 정도로 전원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바이보러'의 와이파이 핫스팟 의복은 치매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진동베개 제작 중 영감을 얻어 '케이블과 전자부품을 섬유와 결합'을 시도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옷으로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에이미 윈터스'의 물과 빛에 반응해 색깔과 무늬가 변화하는 드레스가 있다. 감정 교류를 돕는 옷으로는 '스튜디오 로세하르더'의 인티머시 드레스가 있다. 이를 착용하면 심장 박동에 따라 투명도가 변한다. 스마트 전자박편으로 구성되어 전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센서리'의 인플래타코르셋은 ADHD, 자폐증 환자를 위한 옷이다. 불안 감지 시 압력센서가 작동해 '안정감'을 제공한다. '큐트서킷'의 허그셔츠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열네 개의 압력센서를 통해 안아주는 느낌을 전달한다.
IT가 바꿀 패션의 미래는 새로운 기능과 다이내믹한 아름다움, 환경이나 타인과의 교감을 전제로 한다.

웨딩드레스계의 슈퍼스타, 베라 왕은 마흔 살에 결혼을 앞두고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찾지 못해 직접 드레스를 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일천구백구십 년 뉴욕 맨하탄에 웨딩샵을 설립, 세계 최고급 웨딩드레스 브랜드로 발돋움하였다. 이에는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수석 편집장을 지낸 그녀의 트렌드를 보는 남다른 안목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디자인에 절제의 미학(Less is More)을 추구하여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철학을 패션에 심었다. 여기에, 웨딩드레스가 대여가 아닌 구입이라는 문화를 창출하였다. 샤론 스톤의 일천구백구십팔 년 아카데미 시상식 의상은 아카데미 최고의 레드카펫 의상 중 하나로 회자되는데 이는 베라 왕이 디자인하였다. 그녀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면 의상실 바닥을 청소하고 봉투에 풀칠이라도 하겠다.'는 신념으로 열정을 바쳤다.

덧붙여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 라는 말로 명품 조건을 말하는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빈손에서 열정 하나로 시작하여 '패션이 최고 장인이 최고의 재료로 만드는 단 하나뿐인 창조물!'이라는 꿈을 실현하였다. 이는 브루넬로 쿠치넬리라는 이름으로 만드는 패션이 고가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Arsen Barsamyan,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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