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531

일상으로

겨울 산. 호젓한 산길, 냉랭한 세상에서 이틀째이다. 오늘은 해지기 전에 내려가야지. 군데군데 쌓인 눈과 얼음으로 비명을 지르는 바닥. 땀과 습기로 만신창이인 겉옷이 딱딱하다. 아이젠에 달라붙은 얼음 조각을 떼냈다. 발가락 감촉이 살아나게끔 앞발을 거칠게 내딛었다. 아마도 부어 엉망일거야. 두꺼운 장갑에도 아랑곳없이 곧은 손가락. 얼얼한 뺨을 감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통증이 일 정도이다. 파도소리 같은 바람길을 헤치며 굼뜬 동작으로 나아갔다. 죽으러 가는 길처럼 막막하기 만한 저 언덕만 넘어서자. 의미 없는 다짐이야. 생각이 봄날 이모가 갈던 밭두렁처럼 끝이 없다. 걷는 동안 지난 삶을 복귀하며 고비마다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는데. 그래도 삶이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꿋꿋하게 걸었다. 내려가면 무엇부..

不平則鳴 2022.03.11

사는 일

회사 건물 반지하에 자리잡은 항아리 수제비집. 늘 붐벼 줄을 서야 끼니를 채울 수 있다. 맛있는 건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지. 비스듬히 햇빛 드는 창가 자리에서 동료나 친구와 정담을 나누며 먹으면 즐겁다. "여기 수제비 맛이 삼청동 할머니 집에 뒤지질 않아요." 내 말에, 수제비를 한입 머금은 누구라도 수긍한다. 더러 밀가루 음식에 까다로운 이도 거부하지 않는 수제비.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일까. 그걸 화양리 골목식당에서 찾아냈다. 간이 맞지 않아 갸우뚱했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제 맛을 찾아 끄덕이게 되었다. 오늘도 예외없는데. 혼밥이 대세인지라 여자와 남자 사이 탁자에 끼어앉았다. 내 옆 남자가 투박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임시선별진료소인가요, 웬 사람이 저렇게 많습니까?" "요즘 코로나 환자..

不平則鳴 2022.03.07

꽃 피고지는 사이에

당신이 보낸 장편 소식 꽃이 피었다고 했지 그대와 꽃과 은은한 향기 세상이 온통 밝겠어 이른 시각부터 추적이는 비 봄비 치고는 제법 억세네 젖은 꽃잎에 얹힌 서러움 이 또한 주어진 숙명 다시 꽃 피는 계절이야 꽃 보며 떠올려, 행복한 당신을 오늘 동네 꽃집에 들렀지 꽃들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네 꽃 속에서 고개 든 꽃집주인 꽃 닮은 미소가 웬지 익숙해 어서 오세요. 누구에게 드릴 꽃인가요? 꽃에게서 시작되는 행복이라니 밝고 환한 꽃으로 소담스레 묶었지 흔적 없는 당신이어도 여태껏 선해 어제 일처럼 그리는 나를 알까 무덤가에 놓으면 그대 꽃 핀듯 웃을까 'Jazz Waltz'(Dmitrii Shostakovich), Shostakovich Jazz Suite No.2 'Waltz' / Through LAYE..

不平則鳴 2022.02.08

십이월

하모 지운 초록 생기에 동장군쯤이야 괜찮아 구릉 위 마른 풀 무리 대양을 활강한 흰수염고래 참은 날숨마냥 곧추 세운 몸으로 버텼는데 창검을 세우는 바닥 서릿발에 나야말로 끝없이 밀려오던 꿈을 겨우 떨쳤다 여기가 어딘가 낯선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처럼 서먹서먹했는데 진한 커피 향을 들이키고, Joni Mitchell 익숙한 톤으로 듣는 Both Sides Now에 조금씩 살아나는 말초신경 아껴 먹다가 남겨둔 막대사탕 같았는데 가는 눈발 속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이 생경하다 누추하기 만한 십이월을 그렇게 보냈구나!

不平則鳴 2022.01.26

그 이름에

사이트에 들어가면 본인인증 이외에 필요한 것이 닉네임이다. 닉네임은 이름 외 자기를 기억하게 하고, 알릴 수 있는 또다른 간판이다. 그러기에 약간 익살스러운 이름도 있는가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위인 이름을 따오기도 한다. 동물이나 꽃 이름도 널리 쓰이는 추세이다. 헌데 부르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름은 아예 닉네임으로 못쓰도록 막아 놓은 곳도 있다. 장례식장에 방문한 누군가의 닉네임이 '저승사자'였다는 우스개도 있다. 아는 이의 닉네임이 '에아콘'이나 '나폴레용' 처럼 약간 비튼 이름도 보인다. '엉, 왜 철자가 우리가 아는 이름과 틀리지.' 하며 갸우뚱하다가도 '아마도 거기 거의 동일한 이름이 있기에 순간적인 위트로 바꾸지 않았을까.' 하며 끄덕이기도 한다. 하다보니 내 닉네임도 서너 개 있다. 이것저..

不平則鳴 2021.12.12

통 증

손 닿지 않는 등쪽이 왜 이렇게 가려울까. 어쩌다 그렇다면 넘어가겠는데, 같은 자리에 심이 박힌 것처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가려움. 가제트처럼 팔을 벋고 몸을 비틀어 긁다가는 아이를 불렀다. "어떻냐?" "멍도 들고, 상처도 있는데. 상처는 긁어서 생긴 것 같아요." "그래? 멍이 왜 들었을까." 헌데 놀랄 일이 또 생겼다. 무심코 젖가슴 아래 통증을 느끼고는 쓰다듬다가 살펴보니 앞쪽에도 멍이 들어 있다. 이건 또 뭐야? 앞뒤로 같은 부위가 이렇게 아프다니. 한밤중에 일어났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이 묘한 통증은 뭘까. 가슴 안에 누군가 들어가 장난질을 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증상이 잦다. 가만, 심장이. 아냐, 오른쪽이니 그럴 리도 없고. 어떻든 뭔가 관통한 듯한 돌연한 멍 자국에다가 속에는 날카로운..

不平則鳴 2021.12.10

겨울 예감

누군가를 미워하기. 미워하기 시작하면 마음속 날이 세워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속이 좁았나,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라니. 어이가 없어 자책하다가도 끝내 이를 갈았다. 표적을 정하고 미워하는 저주를 날리는 것은 나에 대한 폐단이며 영혼을 갉아먹는, 죽어야만 끊어질 수 있는 나쁜 행태이다. 모임에서 우연히 짝이 된 후배가 있었다. 단지 나와 이어졌을 뿐이지 별 상관없는 사람이어서 관계가 중요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별도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계제도 없다. 모임을 파하고 돌아온 다음에 맡겨 둔 내 소유물이 생각났다. 문자로 '나중 기회가 되면 그걸 달라' 고 요청했는데, 며칠간 아무 대꾸 없더니 전혀 모르는 이처럼 문자를 보낸다. '기억이 없으니 문자를 보내지 말라'고. 중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不平則鳴 202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