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531

無 愛

천릿길을 한달음에 내달려 네 앞에 앉았다. 숨을 골랐지. 다방 불빛이 왜 이렇게 어둑할까. 조금 여유 있게 왔으면 좋았을걸.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게. 낯선 네 새옷이 생경해 눈을 깜박였어. 오랜만에 보는 우리이니 단장하고 나온 걸 당연하게 생각하기로 했지. 얘기 중에 우스개를 곁들이며, 끊어졌던 우리 시간이야 아무렇지 않게 봉합하려고 애썼지. 그럴 수도 있어. 하찮은 얘기를 여기쯤에서 걷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우리 얼마만일까. 비브라토로 소리 높여 웃으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고 했어. 헌데 말이야. 걸리는 게 있어. 글쎄, 내가 당연히 여겼던 것처럼 네 마음속에 오로지 나만 있으리라 했는데 말야. 왜 자꾸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거야.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을 반추하며 잠깐 ..

不平則鳴 2021.04.25

겨울 끝

"낼모래 저녁 식사 같이 해요." "그러지." 아이의 일방적인 제안에 두말없이 승낙했다. 다음에는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한편으로는 진작 약속한 일정에 별일이 없는가 점검했다. 내가 늙은 건가. 기다렸다는 듯 대뜸 답을 하다니. 그렇게 낼모레가 닥쳐 흥얼흥얼 콧노래를 담고 있는 내게 아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네요. 식사는 다음에 해요." 가타부타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섭섭하다. 이 저녁 약속을 위해 두어 개 미뤄버린 일정도 꺼림칙하고. "아무튼 맘에 안들어." "그런 것 보면 애들이 굉장히 이기적인 것 같아요." "일면 맺고 끓는 거야 확실하다만..... 종이 다른 건지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네." "이제 걔들 세상이니까 형님과 내가 이해를 해줘야지요." 어느새 공직을 마쳐 일..

不平則鳴 2021.03.09

이월은

이월은 팔삭둥이처럼 여겨집니다. 본의 아니게 하자 있다고 낙인 찍혀 여기저기서 놀림 받던 천덕꾸러기. 짧아서 한편으로 허무하게 여겨지는 달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듯 보이기도 하는 통로. 억지로 비켜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에 쫓기고 날이 여느 달과 달리 부족해도 채우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요. 이월은 철없던 우리 아이가 서너 살 적 심심하면 입에 달고 있던 원색 오살난 뿡뿡이 나발이었다가 이빠진 소쿠리에 덧대기 위해 부엌 한쪽에서 이모가 칼로 박음새를 해 들이밀던 쪼개진 대나무이기도 합니다. 불현듯 맞닥뜨렸다가 사그라드는 이월...... 우선 그대에게 안부부터 전합니다. 이런저런 일을 얘기해 줘야지 하고 다듬다가도 해를 넘기고, 달을 지나치며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더듬거리다가 푸념처럼 머..

不平則鳴 2021.02.25

꽃을 위한 노래

노랑 병아리들 오종종한 걸음을 보며 미소 짓는다. '세상이 신기해!' 언 땅이 풀려 촉촉하다. 구석구석마다 헤집고 다니는 병아리들. 혼자 움직이는 법이 없다. 싸릿문으로 향한 하나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기도 하고, 돌담장 아래서 햇빛과 어울려 풀피리 같은 소리로 노래를 한다. 영혼을 품은 것 같은 여린 색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 그리고 사랑. 병아리 색 꽃이 피는 새 봄.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 황매화, 풍년화, 히어리 들이 약속한듯 깨어나 저마다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노랑 꽃에 이어 하얀 꽃마저 피어나면 봄은 절정이다. 성장한 여인처럼 뜨거운 여름, 화끈한 계절에 도도한 빨강 장미꽃. 꽃은 어디서나 자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색을 선택한다. 짙은 유혹의 빛깔을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향기는 또 얼..

不平則鳴 2020.10.04

울음에 대하여

참으라고 한다 아니, 참으려고 한다 차오른 슬픔이 강이 되고 바다로 가는 동안 막걸리만 꿀꺽꿀꺽 들이키는 친구 정작 막걸리가 되는 밥은 먹지 않으면서 안주 위에 어둠이 놓일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탁자와 어둠과 동화한 한 사발 술에 개미와 하루살이가 달려들고 밤코양이가 다가와 입맛을 다셨다 슬픔을 참지 못한 친구가 누웠다 평상 위에 기일게 끈적끈적한 더위가 슬픔을 녹이고 눈물을 흘린다 일백 년도 더된 병귤나무 수피에 재운 헛집은 울음 표상이다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일만팔천 킬로미터 밖 허공을 떠돈다 우리 모두 울지 못하는 영혼이다 술잔과 바다가 따로국밥으로 놀아 견디지 못하는 밤 삭힌 울음이 새벽이 되도록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소우소로우, 해를 사랑한 별의 이야기

不平則鳴 2020.09.10

나를 견디게 하는 것

트롯 경연대회에서 '막걸리 한잔'을 맛깔나게 부른 가수 '영탁'. 그걸 계기로 '영탁'이란 막걸리도 나왔다. 노래와 쾌남 이미지가 잘 결부된 탓이다. 모임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 막걸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나를 위해 으레껏 '막걸리'를 시켜둔다. 다들 소주나 맥주를 마셔도 홀로 막걸리를 고집하고, 기본 한 병은 마시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막걸리를 따뤄놓고 책을 읽거나 바둑을 두거나 사진을 정리하기도 하는데, 나말고도 달려드는 게 있다. 바로 초파리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성가시다. 손을 휘젓거나 두 손을 마주쳐 애써 잡아도 주의를 흩뜨리는 초파리. 이게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잊을 만하면 눈앞을 오가는 통에 결국 일어섰다. 집 안을 들쑤셔 초파..

不平則鳴 2020.09.06

한 번의 만남, 천 번의 이별

한나절을 헤맨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니. 인적 드문 곳이 낫겠지.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숨은 꽃밭을 찾을 수 있을거야. 풀꽃은 씨족사회처럼 모여 산다. 홀아비바람꽃은 홀아비바람꽃대로, 나도개감수는 나도개감수대로. 이쪽 능선과 저쪽 계곡에 피는 꽃무리가 제각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돌로 존재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식물로 태어난다고 했지. 식물의 정점인 꽃, 꽃을 볼 때마다 차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어디에 비길까. 더구나 여긴 쉽게 오기 힘든 강원도 산골. 반드시 꽃다운 꽃을 찾고 말겠다는 욕심에 숲 깊이 들어간다. 시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생기를 주던 봄꽃이 이미 졌거나 며칠 전 요란한 비에 떨어졌어도 이제 여름꽃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허나 차츰 실망스럽다.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으니. 이건 아닌..

不平則鳴 2020.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