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 목덜미에 흰띠 무늬를 두른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몸을 길게 늘이고는 가슴 높이로 앞발을 받쳐든 채 숲을 주시한다. 지난 봄 새끼라도 낳았음직한 말랑말랑한 배와 부드러운 가슴살을 떨며 목으로 가르랑대는 소리를 낸다. 그 앞으로 완강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치고 높다랗게 방책을 세.. 不平則鳴 2015.08.07
내 안에 누군가 있다 어둠 속에 드러나는 주변 사물들. 면과 면을 구분한 선을 떠올린다. 형상이 본질인지, 공간이 본질인지 애매모호한 시간. 정형이라고 단정한 형태가 때로 어그러지다가 변하기도 하여 당황스럽다. 사실과 허구가 뭉뚱그려져 돌아간다. 어지럽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누.. 不平則鳴 2015.07.22
감자처럼 뒹굴고 싶어 장마가 시작된다나, 밭에 심은 감자를 생각했다. 채 여름 전부터 달아올라 해가 오르면 무간지옥이다. 가뭄이 심해 채마밭에 나가면 다들 시들시들했다. 감자 싹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게 태반이어도 비에 썩힐 수야 없지. 이제나저제나 작정하지만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 .. 不平則鳴 2015.07.06
초록을 지우다 여름 주인인 초록. 전 주인이 방을 빼기도 전에 해일처럼 밀려들어 질긴 장벽을 쳤다. 때이른 태풍 몇 개야 진작 꺾였다. 논밭이 갈라지고 호수 바닥이 드러나 흙먼지가 푸썩거렸다. 기상학자들은 가뭄 원인으로 슈퍼 엘니뇨 현상을 들었다. 모기가 기승을 부려 잠을 설치다가 희끄무레한.. 不平則鳴 2015.06.30
원대리 자작나무 숲 오래된 것에서는 애틋한 향기가 난다. 자연에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름드리 나무로 들이찬 숲을 찾는 이유이다. 숲을 이룬 나무를 올려다보면 저마다 기품이 있어 위안을 준다. 숲을 다녀오는 가족 모습에 초록 웃음이 묻어있다. 빙긋 웃는 나를 보며 그들도 손을 흔들었다. 오.. 不平則鳴 2015.06.24
어떤 소식 의사가 하는 말은 늘 모호하다. 흰자위가 많은 눈을 치뜨며 지켜보자는데,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답답한 심정에 매달려 다그치면 몇 가지 검사를 더하자고 할 게다.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응하는데 다음에 설명을 들어도 당최 알아들을 수 없다. 이거야 원, 내 몸 어.. 不平則鳴 2015.06.16
시간을 돌보는 일 해를 가리고 하늘을 찌르던 산이 지금 보니 별 게 아니다. 드문드문 차창에 찍히는 빗발을 지우며 내비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붓이 앉은 시골 마을 앞에 섰다. 밥주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산을 필두로 길게 쫓아들어간 골짜기 안을 기웃거린다. 외진 곳에 방문객이.. 不平則鳴 2015.06.11
그렇게 살아가기 작달막한 키에 어기적거리는 걸음, 뒤뚱대며 흔들리는 몸. 우습기도 하지만 펭귄은 명색이 '남극의 신사'이다. 금방이라도 신사를 만나러 갈 것처럼 일어서다가 기침을 한다발이나 쏟아냈다. 콜록거릴 때마다 오른쪽 가슴을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펭귄은 굳이 남극이 아.. 不平則鳴 2015.06.01
미워하는 것도 나의 힘 후배가 찾아왔다. 찻집에서 만나 주문판을 보는데 주위 사람들 놀란 시선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왜 이래?" "이렇게 늦어서야 선배님께 죄스러움을 사과드립니다." 온 나라에 민주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 너도나도 불만을 드러내고 소리치던 시절, 사사건건 .. 不平則鳴 2015.05.21
초록 동화 전동차 안이 별안간 소란스럽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람,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던 사람, 작은 소리로 통화중이던 사람, 졸고 있던 사람 들이 너도나도 일어섰다. 타는 이와 내리는 이가 엇갈린다. 빈자리를 보고 다들 분주히 쫓아다녔다. 이곳 왕십리에서 정장 차림이던 출근족 대신 산.. 不平則鳴 201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