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주의보 발효중 화장실에 들기만 하면 물부터 내리는 여자들. 와글거리는 소리가 끊어지면 다시 내려야 할까. 남녀 칸이 한데 있는 곳에서 그렇찮아도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판국에, 아니나 다를까 뒤쪽 문이 덜컥 열리며 들어온 여자. 난처하다. 뜬금없이 뚝 끊을 수도 없어서 고민인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 햇빛마당 2009.01.20
바람소리 날카롭고 뾰족한 바람. 잘 드는 칼날처럼 살갗을 저미고 포를 뜨다가 송곳처럼 쑤셔대기도 한다. 부산스러움은 또 감당하기 어렵다. 잠시도 한자리에 머무는 법 없어 세상 곳곳을 쑤썩이며 돌아다녔다. 지하철로 바쁘게 달려가는 이들 옷자락을 휘감아 오르기도 하고, 보도 한켠에 모여 옹송거리는 메.. 不平則鳴 2009.01.15
걸음에 붙여서 한 여자가 죽었다. 말을 나누면 주저하는 법이 없었지. 달콤한 목소리로 향기나는 언어를 싫증나지 않게 엮어내던 입은 닫혔고, 초롱한 눈망울은 감겼으며, 꽃다운 얼굴이 경직되어 상큼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이제 떠올리지 않는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그렇게 즐기던 수영장에 다니러 .. 不平則鳴 2009.01.08
겨울손님 온난화의 영향으로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지만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기온이 영하권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다른 때와 달리 몸이 으스스했다. 간헐적이던 기침이 심해져 기관총을 갈겨대듯 잦아지기도 한다. 잠결에 의식을 돌아오면 이불깃을 모다쥐고 어둠을 깨뜨리는 소리를 세.. 不平則鳴 2009.01.06
푸른 시간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만든댔지. 길은 선이다. 선을 따라가면 이어지게 되는 생각. 때로 과거로 들어서기도 하고 미처 떠올리지도 못한 미래의 날에 닿아 있기도 했다. 길가에 연한 가로등이 생각의 단락을 끊었다. 우뚝 서서 어둠을 쫓는 나트륨 등. 노란 불빛이 방원을 쳐 제 영역을 확실히 알린다. .. 햇빛마당 2009.01.02
해넘이재에서 한참 되었지. 들여다 볼 적마다 정지된 로봇처럼 고정되어 있는 동작이. 책장을 넘기지도 않은 채 펴둔 걸 보며 결국 한소리 한다. "야, 이 녀석아, 글줄도 안읽으며 뭔 생각이 그리 많냐?" 촛점없이 회색 허공에서 까무룩하던 눈이 허둥지둥한다. "이리 나와.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가 볼래?.. 不平則鳴 2008.12.30
구하라, 그리하면 아버지는 비교적 크지 않은 덩치에도 걸음걸이가 확연했다. 골목 어귀에 드는 낌새부터 우리 식구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짧고 무거운 걸음. 밤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것을 느끼던 우리가 몸을 일으킨다. 평소 말씀 없으신 아버지가 인기 있는 것은 이런 저녁답. 손에 들린 군것질거리가 입맛을 다시.. 햇빛마당 2008.12.12
언제까지나 우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자글거리는 라디오. 윙윙-거리던 소음에 잡음도 섞였다가 신호가 잡히면서 차츰 또렷해진다. 아버지는 아침에 뉴스만 듣는다. 당신이 자는 사이에 어떤 사건 사고가 있었을까.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며 세치도 뽑고, 그리고 아침 상에 앉아서도 귀를 기울인다. 수저 소리를 내.. 不平則鳴 2004.09.13
감자처럼 딩굴고 싶어 purple & orange by Kessler Daniel Patrick 막내외삼촌이 결혼한다. 새벽 이른 때부터 온동네 아낙이 다 모인다. 참새 떼처럼 재잘대고 시끌거린다. "이 집 허우대 좋은 신랑은 어디 있대?" "아, 자네가 그걸 왜 물어? 지금 남의 신랑될 사람 찾아서 뭐해!" 깔깔거리며 앞말을 자른다. 들어서던 아낙이 .. 發憤抒情 2004.05.17
황톳길에 갇힌 날 재래시장을 지나는데 들리는 구수한 노래. 낡은 수레가 고여져 있고, 알록달록한 추억의 사탕을 팔고 있다. 달콤쌉싸름한 버터사탕 냄새가 번진다.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눈을 감자 깊은 곳에 재워 둔 낡은 시간들이 새나왔다. 비릿한 삘기맛과 솔 냄새가 불현듯 눈물나게 기억된.. 發憤抒情 200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