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빵을 먹을 때 시월은 종점에 들어선 버스처럼 시동을 껐다. 자정을 넘겨 도착한 기차가 곧장 정비창으로 돌아가듯 금새 숨 죽이고는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렀다. 가을로 들이찬 빈들이 고즈넉하다. 마른 싸릿대 끝에서 강쇠바람에 큰 눈을 굴리던 고추잠자리는 화석이 되었으며, 오후 조막햇빛이 간신.. 不平則鳴 2012.10.15
달의 부재 한가위 달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어릴 적처럼 소원을 빌었느냐고도. 언제 이 도시를 떠났던가. 화사한 시절을 보낸 꽃들. 이슬에 젖어 후줄근한 화단 백일홍을 못본 척 지나쳤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전경이 낯설다. 어린 시절을 딩굴어 요람 같은 곳이었는데. 이른 시각부터.. 不平則鳴 2012.10.12
낮은 곳에서 풀꽃을 찍는다. 땅바닥 한뼘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족속. 비루한 곳에서도 슬픈 기색이라고는 없다. 환한 꽃을 달고 저희들끼리 와글거리는 것을 보면 환희에 찬 합창이 저렇지 않을까. 군대에서 이십오 미터 영점사격 사대에 엎드린 것처럼 숨 죽이고 있으려니, 늑골 아래 근육이.. 不平則鳴 2012.09.27
태풍이 아니온 적 없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걱정이 끊이지 않는 일이다. 아내는 앞으로 건강하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아이는 걱정을 많이 하는 엄마가 걱정스럽다고 한다. 걱정하는 대부분의 일은 지나고 보면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걱정하는 누군가의 얘기를 듣다 보면 심각.. 不平則鳴 2012.09.18
아홉 굽이 시간 구월, 이 즈음에 어울리는 낱말을 떠올렸다. 이슬과 햇살, 친구, 미소, 국화와 향기, 오후, 하늘 등 그리고 한길에서 맞닥뜨린, 누군가를 기다리며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인까지. 형상화를 위하여 낱말마다 형용사 하나씩을 붙여 본다. 옴팡진 이슬, 노릇한 햇살, 오래된 친구, 상큼한 .. 不平則鳴 2012.09.13
산이 푸르다고? 백두대간에 서식하는 산양. 개체수가 줄어들어 보호종으로 지정하고 있다. 초식동물이 가지는 순한 품성에 반하여 절벽타기의 명수이다. 왜 그리 위험한 곳에 오를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상을 신봉하는가, 아니면 생각이 없어서인지. 겨우 바위 벽에 붙은 이끼를 뜯어먹기 위해서.. 不平則鳴 2012.09.10
어느 생의 한나절 두억시니의 손길 같은 한낮 햇볕. 땀이 돋아 끈적이고 미끈덕거리는 맨살. 피부도 예전 같지 않아,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어도 햇볕 아래 나설 적에는 선크림을 바를지 고민중이다. 아무렇지 않게 대낮에 백포를 덮어 쓰고 다니는 이도 눈에 띄더라만. 이해하지 못하던 일에도 날 세우지 .. 不平則鳴 2012.09.04
오늘은 에스프레소로 커피 한 모금에 떠올리는 아프리카의 '붉은 눈동자와 검은 땅'. 또 한 모금에 다큐로 접하던 '고통과 자본주의'를 생각했다. 남은 커피는 이완시키려는 '재인 시간과 각성의 부조리'를 위한 몫이다. 꿀꺽꿀꺽 커피를 들이키는 나를 보며 기어이 한마디한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왜 그렇.. 不平則鳴 2012.08.28
팔월 팔자 우리가 말썽을 부릴 적마다 뱃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고 싶다던 어머니. 말 잘듣는 아이로 다듬어 내고 싶었겠지. 딴은 그렇게 어머니 자궁에 들어 여의치 않은 부분마다 채워지고 거듭나 온전해질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란 것은 나였다. 어느 해 겨울, 큰눈이 내렸다. 손발에 동.. 不平則鳴 2012.08.22
강을 건너가는 비 추적이던 비가 사뭇 거세다. 퉁탕거리다가 차츰 가슴에 들어앉는 빗소리. 마음 한곳에 고이는 생생한 기분에 들뜨기도 한다. 실로폰 소리처럼 보도에 내려 튀는 빗방울에 더위가 흐물흐물 녹아 내렸다. 주체하기 어렵던 정념도 이참에 지워 버려야지. 물기에 젖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不平則鳴 201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