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길하도록 일망무제로 트인 언덕에 올랐다. 사흘 밤낮을 찌푸린 하늘은 낯을 펴지 않았다. 바람이 들끓어 몸을 가눌 수 없다. 다리가 휘청거려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가슴을 연다. 옷깃을 부풀리며 안기는 억센 바람을 한껏 받았다. 바람결을 잡고, 어느 순간 몸을 띄워야지. 날갯죽지로 균형을 맞추.. 不平則鳴 2012.12.31
소리쳐! 아이들이 티격태격한다. 두어 번 그만하라고 언질을 주었건만 그치지 않는다. 불러 혼쭐을 내기 전에 다투는 까닭을 캐물었다. 이미 눈물이 글썽한 동생은 형의 부당한 주먹질에 대해 울먹이면서 조목조목 나열한다. 눈만 내리깔고 있던 형은, 행위에 대한 설명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하.. 不平則鳴 2012.12.28
대병, 1983 여름 몇날 며칠 퍼부은 비로 무른 산이 주저앉는다. 빗물이 앉은뱅이 산을 훑어 패인 흙을 싣고 와당탕 흘렀다. 사방이 물길이다. 건너뛰다가 섬에 갇혀 둘러보면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잦아드는 비. 물기를 안아 묵직한 구름이 산을 거슬러 오른다. 어스름이 내리는 사이 용케 풀벌레 소리가 .. 햇빛마당 2012.12.26
겨울고개를 넘어간다 끝난 판에 너도나도 말을 거든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었다면서, 미묘한 프레임의 차에 표가 갈렸다고 한다. 끄덕이는 이도 있고, 인정할 수 없다며 격한 반응을 보이거나 탄식을 거듭하는 이도 있다. 나야말로 우리 집 보수 원뿌리이다.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그야말로 난공불락.. 不平則鳴 2012.12.21
꽃보다 남자라면 연휴에는 내 몸을 욱죄던 끈이 떨어져 지구 밖에 나앉은 것처럼 여겨진다. 미뤄둔 일을 해치우고 별 다른 계획 없이 빈둥거린다. 몇날 며칠 세면이나 이닦기 외 잡다한 일을 배제하고 지났다. 게으른 아침에 얼굴을 만지면 코 아래와 턱 밑이 꺼끌꺼끌했다. 이참에 수염이나 길러봐. 영화 .. 不平則鳴 2012.12.17
낯선 초상으로 서다 똘망똘망한 눈망울, 순백의 피부, 해맑은 웃음소리, 순진무구한 영혼....선한 것이야말로 모두 아이에게 있다. 아이를 안으면 세상 소란이 멀어진다. 거울 속 얼굴이 신기해 손을 벋는 아이. 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별이 내린 듯 아련한 천사 옆 풍상에 찌든 저 얼굴은 도대체 누구인가. .. 不平則鳴 2012.12.12
십이월의 여자 건너편 화장대에 앉은 나무는, 조금 전까지 나와 지독한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가. 기인 입맞춤의 달콤함을 아직 채 지우지 못했는데 불현듯 새 단장으로 바쁘다니. 파스텔톤의 크림새도우를 눈두덩이에 펴바르는가 하면. 화사한 블러셔로 요란하게 볼연지를 흩뜨리기도 한다. 진한 립그.. 不平則鳴 2012.12.07
돼지인들 만족스럽기만 할까 남대문시장 명물인 야채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민원으로 철거되었다고 한다. 몇년 만에 겨우 자리잡았다며 울먹이는 포장마차 주인 인터뷰도 덧붙여져 있었다. 갑자기 우리 아이가 이사를 가자고 난리법석이다. 이유를 물어도 응답 없이 다짜고짜 졸라대니. 못마땅하고 좋지 않은 기억.. 不平則鳴 2012.12.04
사자는 낭비벽 심한 동물이라지 요즘엔 사냥감을 놓치는 일이 잦다. 대략 구천 번 이상의 사냥을 치르면서도 실패한 적이 극히 드물었는데 왜 이런가. 우선 쫓아가기가 힘들다. 애써 따라가도 힘에 부쳐 목표물을 포획하지 못한다. '신은 죽었다'던 니체는 인간정신의 발달을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의 3단계로 정의했다. .. 햇빛마당 2012.11.27
청색시대 해는 오후 나절 할머니에게 들른 방물장수처럼 서두른다. 해가 마을 입구를 빠져나간 다음 하늘은, 타이탄처럼 받든 동구나무를 불쏘시개로 붉게 타올랐다. 놀이 사그라져도 한참 동안 훤한 서녘과 달리 해가 지난 길을 따라 어두운 보랏빛 너울이 내리며 캄캄해진다. 그게 장엄해서 우.. 햇빛마당 201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