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 선한 눈매의 십이층 단발머리 아주머니. 어떤 때는 이틀에 한번 꼴로 마주친다.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를 손에 쥐고 있기도 해 막연히 하는 일을 짐작하게 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서부터 앞장세웠는데 뾰족구두 소리가 요란하다. 은색 승용차로 총총 가 뒷문부터 열고 신발을 갈아.. 不平則鳴 2013.02.26
잊고 있었어 모르는 새 성큼성큼 자라 마음지붕을 떠받힌 독불나무 한 그루. 허허벌판인 세상에서는 몰랐는데 다들 제 목소리만을 내는 사람들이 간지르면 소란스러움이 어색하고 머문 자리마저 버티기에는 수월치 않아 어설픈 감정만으로 바로 세우는 게 낯설어 멋적어 할 적마다 짙은 그늘을 드리.. 不平則鳴 2013.02.22
늘 끓는 세상 부동산에 목 매는 이가 많다.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라는 용어에 낯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면, 당신은 소위 공직자 자격이 없다. 개발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고 잠잠하던 공덕로터리 주변. 용산발 개발설이 들썩이자 사실 여기부터 달라졌다. 소리 소문 없이 경의선 철로가 걷히.. 不平則鳴 2013.02.15
다시 설 군밤과 오징어, 호빵과 국화빵, 찹쌀떡까지. 당신은 입에 대지도 않으시면서 안자고 기다릴 우리를 위해 손에 들려 있던, 겨울 저녁이면 떠오르는 소소한 군것질거리들. 여동생은 냉큼 아버지 품에 안기다가도 들척지근한 약주 냄새와 까칠한 턱수염에 질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햇빛마당 2013.02.08
겨울 선자령 새벽녘까지 책을 펴들고 있다. 머리부터 덮어쓰고 있던 두꺼운 무명이불을 걷고 목운동을 하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나른한 건 중압감 탓이다. 해체 전의 소련 정치체제에 대한 거부와 비인간성을 폭로한 솔제니친의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사 들고 왔다. 바로 읽지 않고 내.. 不平則鳴 2013.02.05
장편서신 얘기야 누차 들었지만 정작 확인할 수 없었지요. 기온이 떨어져 추워졌다고, 눈이 내려 쌓였다는 사실만으로 겨울을 알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길을 떠납니다. 모름지기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겨울을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구요. 그건 알 수 없어요. 다만 마음 한자락을 커튼으.. 햇빛마당 2013.01.22
그렇게 한 백년 지난 다음 예전 사랑채처럼 말꾼들이 모이는 자리. 얼굴을 모르는 채로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상대가 나이 들거나 어려도, 여자여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어색하지만 근사한 일이다. PC통신이 성행하던 시절, 접속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쪽지로 부르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로서는 버거운 .. 不平則鳴 2013.01.18
겨울 묵상 손톱 뿌리께에 일어난 살갗 가시랭이가 여간 성가셔야지. 무심코 떼냈다가 낭패를 본다. 생살이 뜯겨 금세 피가 맺혔다. 순백의 설원을 가린 나무의 어지러움을 탓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낱 늘어뜨린 나뭇가지라도 한땀한땀이 예사여야지. 숨이 목에 차도록 쫓아든 길. 경련이나 발.. 不平則鳴 2013.01.15
오후 연가 한밤중에만 슬쩍 내리는 눈. 매일 자고 일어나면 천지가 새하얗다. 기온이 영점 아래로 곤두박질쳐 내달리던 강물도 꽁꽁 묶었다. 예년보다 훨씬 일찍 한강이 얼었다며 뉴스에서는 호들갑을 떤다. 같은 위도상의 도시들 중 서울만 혹한에 들어 있다. 그러던 게 한 이틀 곁불 같은 햇살이 .. 不平則鳴 2013.01.08
동물원에서 서바이벌 경연장에 눈 내린다 달아올라 터질 정도로 치열할까봐 숨 죽이고 목을 집어넣은 채 내색 없이 걸어야 하니 화평어린 땅이 있을 리 없어 고슴도치처럼 눈만 반짝이며 내리막에서 낙타처럼 터벅대다가 누처럼 껑충껑충 뛰어보았다 비로소 눈이 성글어지다가 그쳐 수사자처럼 기.. 不平則鳴 201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