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어도 간다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던 친구. 나를 보자 대뜸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화끈하다. 일순간에 시선이 내게 모였다. 대수롭잖게 한 손을 들었다만. 어느 때부터 값비싼 고어텍스 소재의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뿐이던데, 물들인 미제 사지 군복을 걸친 생경한 모습이라니. 끈을 채 매지 않아 헐.. 不平則鳴 2010.12.23
빈집, 나무의 기억 온종일 너만 생각해 한시도 너를 떠올리지 않은 적 없어 품안 가득 바람을 키워도 가지를 흔들어 떠나 보낼 적에도 떨쳐 버릴 수 없는 너 꽃 핀 어느 아침에 눈 뜨며 알았지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들끓는다는 걸 이상하지, 주어진 쓸쓸함이야 천형이라도 거뜬할 줄 알았거든 수면에 번지는 파문처럼 나.. 不平則鳴 2010.12.21
나를 가두는 속박 헨리 라이더 헤거드의 '솔로몬 왕의 동굴'을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교과서 이외의 책을 들고 있으면 혼났다. 부득불 구석진 다락에라도 숨어든다. 깜박이는 꼬마 백열등이 걱정스럽다. 불편한 자세를 바꾸면 삐걱대는 마룻바닥. 숨 죽여 주변 동정을 살핀다. 아프리카 쿠쿠아나 왕국에 숨겨진 보물에.. 不平則鳴 2010.12.16
마음소 건초더미라도 쑤썩이면 묻어나는, 풀밭에 딩굴던 바람에 대한 기억 추운 데 나가 일하기 싫은 허기귀신은 순진한 아이들만 꼬드겼다 십이월 막바지 하늘이라, 먹을것만 찾는 우리를 쥐어박던 엄마 고개만 넘어서면 평탄길이라꼬, 내 거기 속아 내내 고개만 넘었디 이리 망가져뿔다 아이가 무너진 너.. 不平則鳴 2010.12.13
겨울 그 처음, 동백 먼지를 뒤집어 쓰고 구석에서 버틴 동백나무를 보았다. 한겨울 추위를 넘겨야 꽃이 아름답다지만 글쎄, 우선 기온이 맞지 않다. 잎 크기가 아랫녘보다 작을 뿐더러 꽃도 기대할 수 없다. 스무 살에 죽어 버린 고오띠에의 애처러운 삶을 겹쳐본다. 파리의 마들렌 성당 뒤편에 살았던 마르게리뜨 고오띠.. 不平則鳴 2010.12.10
조급한 달 뭉크의 절규에 보이는 것처럼 처절한 시간. 동동거리는 이 시간도 지난 후엔 호사일지 모르지만. 애닯다,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없다니.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서있었다. 세종로네거리에서 건너다 보는 메마른 광장은 온기 없고 지나는 이들은 두서없다. 다들 질린 듯한 표정들 뿐이다. 이런 때 FreeHugg.. 不平則鳴 2010.12.07
노래 세상 동생네와 함께하는 자리. 소문난 고깃집이어서 북적인다. 굽고 씹으며 떠들썩한 가운데 술도 들이켰다. 기분이 고조된다. 분위기를 먼저 알아채는 아이들. 이구동성으로 소리친다. 우리 노래방에 가요. 어, 그래? 노래들을 하고픈 모양이구나. 썩 좋아할 수 없어도 내색 말아야지. 어둡고 쿰쿰한 냄새.. 햇빛마당 2010.12.03
나, 여기 있소 그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 잠시도 그칠 수 없어 안달하는 마음. 백 개의 귀를 열고 천 개의 마음을 모아 등롱에 불 밝히려 한다. 언덕 위로 그대 모습 보일 때까지. 어두운 곳에서도 외로움만으로 견딜 수 있게끔. 눈 내리던 겨울 밤바다를 떠다녔다. 사방이 흔들려 어지럽다. 허나 천지를 무너뜨.. 不平則鳴 2010.11.30
죽음을 꿈꾸는가 꿈은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구이지 않은가. 헐리우드 배우인 짐 캐리는 어려운 시절에 날마다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였을까. 지금 짐 캐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앞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결론, 삶이란 얼마나 간단 명료한가. 허나 이런 삶도 거추장스런 지경이 될 수 있다.. 不平則鳴 2010.11.23
변해가는 원시계곡이라 음습한 부연동. 그래도 산정에 해가 오를 즈음에는 역광에 사방이 금빛으로 우쭐거린다. 바람이불에 포근하게 감춰지다가는 낱낱이 드러나던 낙엽 두둑한 길을 가는 중에 귀를 쫑긋거린다. 길이라지만 길이기 힘든 길. 발은 푹푹 빠지고 경사진 바닥은 금방이라도 계곡쪽으로 몸을 밀칠.. 不平則鳴 2010.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