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봄을 찾아 승강기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해끔한 얼굴. 선녀처럼 미끄러져 들어오며 목례를 날린다. 잘 익은 과일같은 아랫층 여자. 냉큼 들어와선 뒤에서 돌이 되었는지. 뒤통수가 간질거린다. 달콤하고 세련된 냄새가 폴폴 나 뒤엉킨다. 무심코 인사를 받았더라면 무안할 뻔했다. 사방 가지를 벋는.. 不平則鳴 2010.03.16
포근한 산들바람아 동계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에 관심을 쏟는 중에 듣는 영화 오래보기 시합. 별 게 다 있네. 이번이 두 번째라는 데 육만여 명이나 응모했다. 예심을 통과한 이백이십팔 명이 참가하여 최종 네 명이 서른다섯 편까지 관람하기를 겨뤄(?)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다고 한다. 당연히 70시간51분18초.. 不平則鳴 2010.03.09
강아지와 하늘과 길과 우여곡절 끝에 집에 들인 개 한 마리. 진돗개 혈통이라지만 글쎄. 화단 한쪽에 매어 둔다. 이건 순둥이여서 누가 와도 짖을 줄도 모르고. 하늘까지 닿은 떡갈나무 아래, 꼬리를 말고 숨 죽이고 있다가 담장 아래 노란 햇빛이라도 슬슬 내려오면 그제서야 주변 동정을 살피며 거동한다. 우.. 不平則鳴 2010.03.05
기억을 깨우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앞뒷집에 기거해 오감서 살믄 좋제?" "어릴 적에도 한 동네서 만날 싸웠는데 쪼그랑 망태기가 되어서도 다시 치고받으믄서 살락꼬?" 오랜만에 모여 왈가왈부하는 친구들. 자라서 너도나도 일가를 이뤄 쫓아나가더니, 인제 어떡하면 돌아올까 궁리를 한다. 결론은, 나.. 不平則鳴 2010.03.02
지금 행복한가 동네에서 나와 잘 어울리는 성집이. 골목에서 팽이돌리기나 딱지치기를 즐기거나 도랑에 나가 얼음지치기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아 앵돌아져선 노려보며 으르릉대기도 하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쫓아나가 어울렸다. 어느 때 이웃 동네에까.. 不平則鳴 2010.02.25
가는 이월 간당간당하는 겨울. 와중에 비 오고 눈도 내리더니 오늘은 하늘이 열렸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 머문 아이들처럼 결진 구름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바스라질 것 같던 나뭇가지가 물기를 머금어 힘겨운 날. 수업을 마치고 와 대청에 책가방을 던져두면 비로소 해방되어 홀가분하다. 그.. 不平則鳴 2010.02.23
세 월 퇴근시각에 맞춰 오겠다는 친구, 더러 마주하여 시시껄렁한 얘기라도 나누는 사이기에 마다 할 이유가 없다. 헌데 진창길 차가 밀린다며 문자메시지만 거듭 날리더니 결국 전화한다. 늦을지 모르니 늘 가는 시장 선술집에 가 있으라고. 바로 답해야 하지만 막 실갱이를 시작한 참이다. 마.. 不平則鳴 2010.02.16
수다로 살기 유선으로 방영되는 마카로니 웨스턴 한편. 딱히 별일 없던 참에 늦은 시각까지 딩굴거리며 보았다. 홍콩판 무협영화처럼 한때 들어오기만 하면 사족 못쓰곤 득달같이 달려갔었는데. 활극 등에 질색하는 아내도 옆에서 시청한다. 남녀가 생각하는 영역이 다른지라 가끔 이해되지 않는 부.. 不平則鳴 2010.02.05
호랭이가 버틴 고갯길 겨우 한 장 넘긴 달력. 오메가'Ω' 모양으로 불끈 솟은 일출 사진이 드높은 산정, 순백의 눈밭으로 바뀌었다. 숨가쁘게 지난 달을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란다. 뭐가 조급해선 그리 서둘렀을까. 연말을 지나며 이저 사람이 날린 메일 중 반짝 눈이 가는 데가 있다. 그냥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 不平則鳴 2010.02.02
코끼리 울음 솟대처럼 서서 우뚝한 은사시나무를 지표로 소롯길을 걷는다. 허공을 쫓아 온 햇빛이 은사시나뭇잎에서 되쏘여 산지사방으로 팔랑거리는 날개를 편다. 길이 꺾일 때마다 잠겨드는 솟대, 그걸 다시 찾으며 조급한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햇빛이 둥그렇게 모인 둔덕에서 멈췄다. 깊은 .. 햇빛마당 2010.01.28